안이 바깥을 키우다
도마 위 반으로 잘린 파프리카를 보면서
철 내내 그것이 집중한 건 겉이었음을 짐작합니다.
속을 채우는 다른 열매채소와 달리
파프리카나 피망이나 고추는
바깥을 만드는데 충실한 듯 합니다.
공기 한 줌이 들어있을 것 같은 텅 빈 그 안이 넓을수록
외피가 커지니 말입니다.
양배추처럼 속이 꽉 찬 사람이 되라는 말도 있지만
바깥에 충실해라, 라고도 해야 할 것도 같네요.
속에서 오래도록 숙성시켜 내보낸 바깥.
그것이 분위기와 인품이겠지요.
젊을 때처럼 꼿꼿하거나 예쁠 수는 없지만
나이 들어 표정에서 흐르는 기품은,
이러저런 갈등이나 욕망을 비워내고 얻어내는
멋진 겉입니다.
- 최선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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