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좋은생각(인용글)

백 개의 달

따시딸레!박상면 2018. 6. 8. 08:49


시큼한 봄이 베어 먹은 살구는 그믐으로 익는데
저 달은, 입덧이 말끔히 비운 사기그릇입니다

배는 곯지 말아야지, 졸음을 참는 달에 푸짐한 맛을 옮겨 담으면
삼거리 원조 찐빵이 모락모락 군침을 불러들였습니다
반으로 쪼갠 햇고구마엔 노란 보름이 들어있고
솥뚜껑에 부쳐 내놓은 배추전에 부풀어 오른 배고픔이 납작해졌습니다

후일담은 겨울 건넌 따스함 같아서
달빛보다 마음이 더 밝아질 때쯤 주렁주렁 별들을 채우는 물병자리
빛들이 비워지면
아껴둔 샛별하나 오래오래 녹여먹어야겠습니다

백 명이 바라보면 백 개의 달이 되지
희고 둥근 백 개의 방에서 맛보는 백 가지 맛

후루룩, 손잡이가 없어 소리가 더욱 매끄러운
볼 깊은 달들을 꺼내
포옥 우려낸 멸치국물에 국수 한사리씩 말아내도 좋겠습니다

- 최연수, 시 '백 개의 달'


백 명이 바라보면 정말 백 개의 달이 되지요.
달은 바라보는 이의 상상으로 백 개의 그릇이 될 수도 있고
백가지 맛이 되기도 합니다.
그 상상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우주의 논리.
억지라고 치부하지 않는 넉넉함이 나의 작은 존재도 잊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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