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한 장
네 거리 앞 건널목. 허름한 그림에 눈이 멎는다.
겨울담쟁이처럼 벽에 납작 눌러 붙은 그림이
오래 전부터 보아온 듯 낯익다.
건물을 의지 삼은 손바닥만 한 자리,
춘곤의 햇살은 푸성귀를 꾸려 나온 노부부를 베껴 벽에 내걸었다.
구부정한 벽화,
무채색의 그림자가 마치 흑백사진 한 장이다.
오래전 낡은 사진 속으로 들어간 내 할아버지도 그랬다.
세상의 벽을 타고 오르던 마른 손등은
힘줄 불거진 담쟁이덩굴이었다.
깊게 우물진 눈에 지나온 길이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일생을 등짐 져 날랐을 어깨 아래로
조금은 헐렁해 보이는 옷이 주름져 내렸다.
세상과 한판 붙었을 허리를 구멍 남아도는 허리띠가 받쳐주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을 가져간 노인에게서
사람이 나뭇잎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는 걸 안다.
저녁이 되어서야만,
생의 가을에 접어들어야만 읽혀지는 문장들이다.
- 최선옥 시인
'좋은글 좋은생각(인용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꽃이 나에게 (0) | 2015.04.10 |
---|---|
최선 속에 길이 있다 (0) | 2015.04.06 |
봄꽃은 겸손한 지혜를 먹고 핀다 (0) | 2015.04.02 |
볼거리도 많지만 (0) | 2015.03.30 |
유리와 거울 (0) | 2015.03.27 |